제례의 모든 종류 설명
제례(祭禮)는 제사(祭祀)를 지내는 예절(禮節)이다.

사시제
계절의 흐름을 기억하여 지내는 제사의 으뜸, 사시제
사시제(四時祭)는 시제(時祭)라고도 하는데, 유교식 제례에서 가장 대표적인 제사이다. 제사를 지내는 시기는 사계절의 가운데에 있는 중월(仲月)에 지낸다. 제사의 대상은 사당에 모신 4대의 조상이다. 만약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시고 있을 경우 불천지위 역시 사시제의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조를 모시지 않기 때문에 시조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제사는 『주자가례(朱子家禮)』나 도암 이재(陶庵 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 우리나라 예서(禮書)에 모두 등장하는 제사이다.
사시제를 지내는 뜻은 계절이 옮겨가고 절기가 바뀌면 감격하여 어버이를 생각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올려 효경의 마음을 펴는 제사이다. 따라서 사시제란 계절의 흐름을 기억하여 지내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효의 실천인 것이다.
1년에 4번 지내는 제사, 사시제
사시제를 지내는 시기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4계절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논란이 있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학봉 김성일(鶴峯 金成一)은 춘분ㆍ하지ㆍ추분ㆍ동지에 지낸다고 하였다. 한편 도암 이재(陶菴 李縡)는 초봄ㆍ초여름ㆍ초가을ㆍ초겨울에 날을 잡아서 지낸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날을 잡는 시기는 보통 열흘 전이고, 각 계절의 가운데 달 중에서 정일(丁日) 혹은 해일(亥日)로 가린다. 세부적인 시기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1년에 4번 지내는 원칙에는 차이가 없다.
제사를 지내는 시간은 질명(質明)이라고 하여 동이 트면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율곡은 궐명(厥明)이라고 하여 어두운 새벽에 지낸다고 하여 차이가 있다.
정침 혹은 청사에서 지내는 제사, 사시제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정침(正寢) 혹은 청사(廳事)이다. 청사가 별도로 있을 경우 청사에서 지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정침의 대청에서 지낸다. 사시제는 한꺼번에 모든 신주를 정침에 내모시고 합동으로 지내는 것이 다른 제사와는 차이가 있다. 신위를 모시는 방법은 제일 서쪽에서부터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의 신위를 모시는데, 모두 고위(考位)와 비위(?位)를 합설하여 모신다. 이 때 고위는 서쪽, 비위는 동쪽에 모신다.
절차상 표준적 모습을 보이는 제사, 사시제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사시제가 제사의 으뜸이기 때문에 표준적 모습을 보인다. 제사는 주인 등이 모두 3일 전에 재계(齋戒)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루 전에 정침에 신위를 모실 자리를 마련한다. 주인은 희생을 살피고, 주부(主婦)는 제기를 씻는다. 그리고 제사음식을 갖춘다. 동이 트면 사당으로 가서 신주를 정침으로 모신다. 이때 신주를 정침으로 모신다는 고사를 읽어 고한다. 고위는 주인이, 비위는 주부가 모신다. 이러한 과정을 출주(出主)라고 한다.
이어 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참신(參神)을 하고, 신이 강림(降臨)하기를 청하는 강신(降神)을 하고, 신을 모셨기 때문에 따뜻한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을 하여 완전하게 제사를 지낼 준비를 마친다.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는 초헌(初獻)을 하면서 그날 제사를 지내는 사유를 말씀드리는 축문(祝文)을 읽는다. 이어 두 번째 잔인 아헌(亞獻)과 세 번째 잔인 종헌(終獻)을 한다. 종헌에서 좨주(祭酒)를 하여 줄어버린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는 첨작(添酌)과 숟가락을 밥에 꽂고 젓가락을 바르게 하는 유식(侑食)을 한다.
이제 제사음식을 드실 준비를 했으므로 문을 닫아 음식을 흠향(歆饗)하시도록 하는 합문(閤門)을 한다. 흠향을 다 하면 다시 문을 여는 계문(啓門)을 하고, 조상이 내려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하는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맛보고 술을 마시는 수조(受?)를 하고 제사를 마쳤다고 고한다. 참사자 모두가 신에게 송별 인사를 하는 사신(辭神)을 하면 다시 신주를 사당으로 모시는 납주(納主)를 한다. 제사를 마쳤으므로 제사상과 기물을 치우는 철찬(撤饌)을 하고, 모든 참사자와 후손이 조상이 내려 준 복을 받는 음복인 준(?)을 마지막으로 제사를 마친다.
실체를 알기 어려울 만큼 전승되지 못한 사시제
사시제는 제례의 대표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지만, 현재는 그 실체를 알기 어렵다. 또한 사시제의 전승 과정, 단절시기 역시 정확하게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조선 중기에도 정식 제사가 아닌데도 묘제(墓祭)를 중요시하고 정식 제사인 사시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이미 이때 사시제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시속명절(時俗名節)인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ㆍ중구(重九)ㆍ동지(冬至) 등의 명절에도 묘사를 지냈기 때문에 사시제를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 사시제는 점을 쳐서 날을 잡지 못할 경우 춘분, 추분, 하지, 동지에 지내는 것도 괜찮다고 한 사실을 보면 명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다. 이와 함께 갑오경장으로 인해 모든 문물과 문화가 바뀜으로 인해 사시제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1934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제정한「의례준칙(儀禮準則)」의 제례 조에서는 기제사(忌祭祀)와 묘제(墓祭)만을 제사의 종류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미 이때 사시제 자체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사시제는 그 시기로 인해 명절이나 속절에 올리는 차례(茶禮)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현지 조사에 의하면 시제는 시사라고 하여 주로 묘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도 사시제가 명절 차례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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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제
성씨의 시조에게 지내는 제사, 초조제
초조제(初祖祭)란 자기 성씨의 시조(始祖)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초조제는 시조의 대를 잇는 종자(宗子)만이 지낼 수 있다. 시조에 대한 제사는 체제(?祭)와 비슷하다. 체제란 종묘(宗廟)의 제사로 천자나 제후가 삼년상을 마치고 조상의 신주를 종묘의 한곳에 합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종묘제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시조에 대한 제사는 정이천(程伊川)이 지낸다고 했는데, “초조제는 효자의 마음을 극진하게 하는 것이지만, 체제와 가까워 일반 백성이 지내기에는 무리가 있어 지내지 않았다.”고 하였다.
초조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제사의 종류로 등재되어 있지만 주자 역시 그 당시에 이미 지내지 않는 제사라고 하였다.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뜻은 시조는 그 성씨의 처음에 사람을 낸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이 일어나는 날인 동지에 지내는 제사, 초조제
초조제를 지내는 시기는 매년 동지(冬至)이다. 동지에 지내는 이유는 동지가 양(陽)이 일어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유사함을 쫓아서 동지에 지낸다고 한다. 초조제를 지내는 장소는 정침이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사시제와 동일하다. 초조는 유일하게 1위(一位)밖에 없으므로 이 한 위의 고위(考位)와 비위(?位)를 함께 모시고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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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제
고조 이상의 선조에게 지내는 제사, 선조제
선조제(先祖祭)는 초조(初祖) 이하 6세 이상의 선조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제사를 지내는 대상은 시조를 계승하는 종가(혹은 종자)에서는 시조 혹은 초조를 제외한 선조가 되고, 고조(高祖)를 계승하는 종가에서는 6세 이상의 선조가 된다.
선조제를 지내는 이유는 자신의 근본이 선조에게서 내려오기 때문에 이를 보답하는 의미에서 지내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정이천(程伊川)은 “효자의 마음이 극진하기 때문에 선조제를 지낸다.”고 하였으나, “협제(?祭)와 비슷하여 일반 백성이 지내기에는 무리가 있어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하여 지내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대부분의 예서(禮書)에서는 초조제와 선조제를 지내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만물이 생겨나는 입춘에 지내는 제사, 선조제
제사를 지내는 시기는 입춘(立春)이다. 입춘에 선조제를 지내는 이유는 입춘이 만물이 생겨나는 처음이므로 그 유사함을 상징하여 이 때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정침이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초조제, 사시제와 같다. 모시는 신위는 선조가 여럿이지만 고위와 비위를 대표로 내세워 모두 함께 모시기 때문에 고위와 신주만을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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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제
아버지에게 지내는 제사, 녜제
녜제(?祭)는 아버지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대를 잇는 맏아들이 지낼 수 있고 둘째 아들 이하는 지낼 수 없다. 녜는 아버지의 사당을 말하는데, 이는 가깝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은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정침이다. 정침의 대청 가운데 서쪽을 위쪽으로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리를 마련한다.
만물이 성숙하는 늦가을에 지내는 제사, 녜제
제사를 지내는 시기는 늦가을로 이를 계추(季秋)라고 한다. 제사를 지내는 날짜는 사시제처럼 점을 쳐서 날을 잡는다. 늦가을에 이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이때가 만물이 성숙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사시제와 같다. 다만 부모의 두 신위만 모시는 것이 다르다.
녜제에 대하여는 주자(朱子)의 『주자가례(朱子家禮)』나 도암 이재(陶菴 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에 그 지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동암 유장원(東巖 柳長源)은 『상변통고(常變通攷)』에서 “분수에 넘치게 윗사람을 본뜨는 것 같다.”고 하여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여 녜제를 지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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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제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기 위해 지내는 보편화된 제사, 기제사
기제사(忌祭祀)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사라고 할 때 이 기제사를 가리킬 정도로 보편화된 제사이다. 흔히 사대봉사라고 할 때 이 기제사의 제사를 지내는 범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자신으로부터 4대의 조상인 고조부모까지 기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기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이다. 그래서 이 날을 기일(忌日)이라고 했고 모든 행동을 삼가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기일에는 모든 일을 삼간다고 하는 것은 이 날이 불길해서가 아니라 조상이 돌아가신 날이어서 슬프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감히 그 사사로운 정을 다하여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즐겁고 유쾌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제사의 기(忌)는 금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슬픔을 머금고 있어서 감히 다른 일에 미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와 함께 사용되는 용어인 휘일(諱日) 역시 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때 이 휘(諱) 자를 썼기 때문에 기일을 휘일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 기제사
기제사를 지내는 시기는 어버이가 돌아가신 날이다. 그래서 점을 치거나 시기를 정해놓지 않는다. 이 때 만약 윤달에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윤달이었던 원래의 달 기일에 지낸다고 한다. 만약 다시 윤년이 들어 윤달이 되었을 경우에도 윤달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달에 지낸다. 다만 윤달의 기일에는 삼가기는 하지만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또한 그 달의 마지막 날에 돌아가셨을 경우 음력에는 큰달과 작은 달이 있어 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큰달이 되어 30일이 되면 30일에 지내고, 작은 달이 되어 29일이 되면 29일에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집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단설과 합설
제사를 모시는 대상은 돌아가신 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돌아가신 분만을 모실 것인가 부부를 함께 모실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단지 하나의 신위만 설치한다. 한 분의 신위만 설치하는 것이 올바를 예이다. 대개 기일은 초상의 나머지다. 그 어버이가 돌아가신 날을 만나 어버이를 생각하며 그 신위에 제사지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신위를 모시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제사를 받아야 할 신위에게만 제사지내고 배위의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그것은 배위의 제사를 박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슬픔이 제사를 지내야 할 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만 한 분의 신위에게만 제사지내는 것이 옳다.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지낸다는 것은 비록 선유의 말씀이 있더라도 쫓을 수 없을 듯하다.” 하였다. 따라서 원칙은 돌아가신 분만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바른 예라고 하였다. 이처럼 돌아가신 분만 모시고 지내는 것을 단설(單設)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부부를 함께 모시는 합설(合設)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역시 예설(禮說)은 단설이 맞지만 집안에서는 합설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반드시 단설을 하도록 해야겠다고 하였다. 학봉 김성일(鶴峯 金成一) 역시 그의 저서 『봉선제규(奉先諸規)』에서 단설이 올바른 예이고, 합설을 하는 것은 인정에 근본을 둔 것이라고 하여 양쪽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에도 집안의 전통에 따라 합설 혹은 단설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날의 첫 시각인 자시에 정침에서 지내는 제사, 기제사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정침이다. 제사를 지내는 시간은 궐명(厥明)에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돌아가신 날의 첫 시각인 자시(子時)에 지낸다. 즉,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시각이다.
제사의 절차나 제수(祭需)는 사시제와 같으나 수조(受?)와 음복(飮福)의 절차가 없다. 그러나 현재 기제사를 지내는 집에서는 대부분이 음복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유교식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유명 종가의 경우에도 기제사에서 음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아마도 유교식 의례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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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제
4대가 지나도 폐하지 않는 유명한 선조의 제사, 불천위제
불천위제(不遷位祭)는 기제사의 일종이다. 불천지위(不遷之位)란 만세(萬世)가 지나도 제사를 폐하지 않는 조상을 말하는데, 이 분의 제사를 불천위제라고 한다. 말하자면 4대봉사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4대가 지나도 제사를 폐하지 않는 유명한 선조의 제사이다.
기제사의 대상이 되는 사대봉사(四代奉祀)의 경우 4대까지 제사를 받들던 사람이 돌아가시고, 탈상(脫喪)을 하는 대상을 지내면 고인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게 된다. 사당에 원래 있던 4대조의 신주는 자연히 새로이 제사를 받들게 되는 고인의 아들로부터는 5대가 된다. 이러한 현상을 친진(親盡)이라고 한다. 즉 4대(고조)의 관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 때 5대가 되는 신주는 4대조 관계가 끝나지 않은 사람의 집인 최장방(最長房)에게 옮겨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체천(遞遷)이라고 한다. 만약 체천을 할 수 있는 자손이 없을 경우 깨끗한 곳에 신주를 묻는데, 이를 조매(?埋) 혹은 조주(?主), 매주(埋主)라고 한다. 이때부터 주손의 집에서는 더 이상 5대조에 대해 기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이로써 5대조는 기제사의 대상에서 묘제(墓祭)의 대상으로 옮겨간다.
이에 따라 사당의 신주를 모시는 사람을 바꾸고, 질서를 다시 배치하기 위해 개제(改題)를 해야 한다. 그래서 상례의 마지막 절차인 길제(吉祭)를 지낼 때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는 개제(改題)를 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신주(神主)의 분면(粉面)에 모시는 사람이 고인(故人)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던 것을 고인의 사망으로 인해 고인의 아들이 모시는 것으로 그 이름을 분면에 고쳐 쓰는 것을 말한다.
나라, 지역의 유림 또는 문중에서 추천하여 모시는 제사, 불천위제
그러나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 공적(功績)에 따라 나라에서 또는 지역의 유림에서 불천지위로 받들기로 결정한 분은 집안에 별도로 사당을 만들거나 사당의 한쪽에 별도의 감실을 만들어 만세가 지나도록 끊임없이 제사를 모시게 된다. 이를 불천위제사라고 한다.
불천지위는 그 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이다. 국가에서 죽은 이의 탁월한 공적을 인정하여 불천지위로 명한 것이다. 그 대상은 공훈이 탁월한 공신, 문묘에 배향된 유현, 왕자, 공주, 대군, 왕의 장인인 국구, 절의의 충신, 공적이 있는 재상 등이다. 둘째는 그 지역 유림들의 공론으로 대상 인물의 학문과 인격과 행실이 뛰어나다고 인정되어 불천지위로 받들기로 결정한 분이다. 셋째는 그 문중에서 불천지위로 받들어야 한다고 뜻을 모아 결정한 조상으로 문중불천위라고 한다. 문중불천위는 그 문중의 훌륭한 조상이다. 이처럼 불천지위는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 집안에 불천지위가 있으면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제관과 제물 준비 등에서 기제사와 차이를 보이는 제사, 불천위제사
불천위제사는 기제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제사와는 약간 다른 측면이 있었다. 우선 후손만이 참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역의 다른 문중의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기제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제물 역시 타 문중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그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제관(祭官)을 선정하는 데에도 차이가 있다. 초헌관과 아헌관은 그 집안의 주손과 주부가 하지만, 종헌관이나 축관, 집사자 등은 천거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다르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기제사와 동일하다.
문중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문중의 위세를 과시하는 제사, 불천위제사
불천위제사는 현재의 자신이 있도록 해 준 훌륭한 조상의 덕을 기리고 혈족의 정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문중성원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불천위제사를 통해 그 지역 유림이 소통을 함과 동시에 이 기회를 통해 유림의 현안을 해결하는 사회적 기능도 한다. 또한 불천위제사는 타 문중에 대해서는 자기 문중의 위세를 과시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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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제
조상의 산소에서 보통 1년에 2번 지내는 제사, 묘제
묘제(墓祭)는 조상의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로 묘사(墓祀)라고도 한다. 따라서 시조(始祖)로부터 바로 전에 돌아가신 조상까지가 제사의 대상이다. 지역에 따라 시제(時祭), 시향(時享), 묘사(墓祀), 회전(會奠)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회전이란 회전제사(會奠祭祀)라고도 하는데, 문중(門中) 성원이 함께 모여 시조, 파시조(派始祖)의 묘소에 모여 지내는 제사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원래 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없었으나 후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하여 예의 원칙에 합당하지 않아 지내지 않아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예의 본뜻은 아니지만 인정상 해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묘제를 지낸다고 하였다. 조상의 체백(體魄)이지만 효자의 추모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묘제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시된 절충안은 3종류가 있다. 첫째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3월 상순에 지내고, 다시 일반적인 관행에 따라 10월 1일에 지내는 방법이다. 둘째는 3월 상순과 10월 상순에 날짜를 정하여 묘사를 지내는 방법이다. 셋째는 한식과 10월에 날을 잡아 지내는 방법이 전해오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한식절사(寒食節祀)는 바로 이 묘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2번 묘제를 지내는 것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산소에서 지내므로 몇 가지 절차가 생략되거나 차이를 보이는 제사, 묘제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묘소이다. 그러나 장마 등 자연재해 등으로 묘소(墓所)에 갈 수 없을 경우에는 단(壇)을 쌓거나 재실(齋室)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제수(祭需)는 사시제(四時祭)와 같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과 절차는 모두 집에서 지내는 사시제나 기제사와 기본적인 방법과 절차는 같다. 그러나 묘소인 산소(山所)에서 지내기 때문에 몇 가지 절차가 생략되거나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신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묘소의 체백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출주(出主)와 납주(納主)의 과정이 생략된다. 둘째는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신이 강림하기를 기원하는 강신(降神)의 절차에서 나물과 과일을 진설하여 출주한 신이 의지하게 하고, 강신한 후에 모든 음식을 올리는 제찬을 올리는 진찬(進饌)의 절차가 있다. 그러나 산소는 이미 체백을 의탁한 곳이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동시에 진설한다고 한다. 셋째는 아헌을 할 때 주부(主婦)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제와 친척이나 친구가 올리게 하는 점이 다르다. 넷째는 유식(侑食) 즉, 합문(闔門)의 절차가 없다. 이는 묘소에서 지내기 때문으로 계문(啓門)을 한 후에 숭늉을 올리는 절차는 행한다. 다섯째는 제사를 마치고 산소가 있는 산의 신(神)인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토제(祀后祭)가 있다. 제사를 지낸 다음에 후토제를 지내는 것은 제사의 목적이 오로지 묘사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보고서에 묘제의 대상에 대해 기제사에서 모시지 않는 5대조 이상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보고들이 있는데, 어떤 예서(禮書)에서도 이러한 규정은 없다. 현재 개인의 묘제는 추석이나 설의 성묘로 약해졌으나 문중(門中)이 모이는 대종(大宗)의 묘제는 여전히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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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토제
묘소를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로 지내는 제사, 후토제
후토제(后土祭)는 묘소(墓所)가 자리하고 있는 산의 주인인 산신 혹은 후토(后土)에게 올리는 제사로 산신제(山神祭)라고도 한다. 제사를 지내는 뜻은 조상의 묘소가 있는 산의 산신(山神)인 후토신(后土神)에게 묘소를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로 지내는 제사이다. 축문에 의하면 묘에 나무꾼이나 목동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묘소가 안전하게 영구히 존속하는 것은 신의 은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수(祭需)를 갖추어 제사를 지낸다는 것도 이러한 뜻이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묘소 왼쪽이라고 하는데, 방위상 묘소의 동쪽이다.
묘제의 제수와 동일하게 준비하는 제사, 후토제
후토제에 차리는 음식은 묘제(墓祭)의 음식을 준비할 때 함께 준비하는데, 묘제의 제수와 동일하게 준비한다. 제수는 생선ㆍ고기ㆍ떡류ㆍ국수류를 담은 소반 네 개를 제사 지내는 자리 남쪽 끝에 진설하고 소반ㆍ술잔ㆍ숟가락 ㆍ젓가락을 그 북쪽에 진설하고, 다른 것은 모두 묘제와 같이 한다.
후토제는 묘소의 제사를 중요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소홀한 감이 있었는데, 주자(朱子)는 이에 대해 “요사이 묘제를 지낼 때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지내는 예를 보니 전연 지리멸렬하여 매우 걱정스러웠다. 이미 선공의 몸을 산림에 맡기고 그 산림의 주인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금후로는 묘제에서와 똑같이 채소ㆍ과일ㆍ자(?, 소금에 절인 생선)ㆍ포는 공히 열 그릇, 고기와 생선, 만두는 각각 큰 쟁반에 담고, 갖추어야 할 제수는 모두 갖춘다. 국ㆍ밥ㆍ차ㆍ탕은 각각 한 그릇씩 진설한다. 그리하여 부모를 편안하게 하고 신을 섬기는 뜻을 다하여 차등이 있게 하지 말라.”고 하였을 정도로 후토제를 중요시했다. 이때 촛불은 켜지 않는다.
묘제를 지낸 후에 지내는 제사, 후토제
후토제는 묘제를 지낸 다음에 지낸다. 이는 비록 선조의 체백이 산림에 의지시켰지만, 묘사를 지내는 일이 주목적이므로 묘제를 지낸 다음에 지낸다. 이는 나의 신이 있고, 산신이 있다는 생각에서다. 만약 선조 및 자손의 묘소가 한 곳에 모여 있을 경우 여러 위(位)에 대한 제사를 마친 뒤에 가장 존귀한 분의 묘소 왼쪽인 동쪽에서 행한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향석(香席) 앞에 꿇어 앉아 향을 피우는 분향(焚香)을 하고 술을 모사에 붓는 뇌주(?酒)를 하고 몸을 숙여 엎드렸다가 일어나 자리로 돌아온다. 이른바 강신(降神)이다. 그리고 신에게 인사를 하는 참신(參神)을 하고, 초헌의 헌작(獻爵)을 하고 꿇어앉으면 축문(祝文)을 읽는다. 이어 두 번째 잔인 아헌(亞獻), 종헌(終獻)을 하고 사신(辭神)을 하여 제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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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
선조의 묘소를 청소하고 인사드리는 일, 성묘
성묘(省墓)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선조의 묘소(墓所)를 청소하고 인사드리는 일이다. 이는 묘소는 선조의 체백(體魄)이 갈무리 된 곳으로 당연히 때에 맞춰 청소를 하고 인사를 드려 황폐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묘소에 서린 차가운 안개, 넝쿨진 풀을 보면 슬픈 마음이 생겨 인정상 그만 둘 수 없기 때문에 성묘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성묘는 선조의 묘소에 이상이 없는가를 살피고 인사를 드리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세대가 서로 전해 풍속을 이룬 한식 성묘
성묘를 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한다. 원(元)나라 때 한식(寒食)에 묘소에 가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성묘와 같았다고 한다. 한식날 성묘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후 들 한가운데에서 장사를 지내 세상과 떨어져 있게 되니, 효자의 추모하는 마음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추위와 더위가 변하여 옮기는 때가 되면 감회가 더욱 더하여 으레 분묘를 살피고 알현하여 사모와 공경을 나타냈다. 지금 한식날 묘에 가서 드리는 제사는 비록 예경에는 없지만 세대가 서로 전해 풍속을 이루었다. 위로는 천자부터 상응하는 예가 있고, 아래로는 서인들까지 묘소에 가서 드리는 제사가 있다. 밭과 들과 길에는 사우(士友)들이 두루 가득하고 종과 품팔이와 거지도 모두 부모의 묘소에 오르니, 마의(馬醫; 말을 치료하는 천직에 있는 사람)와 하휴(夏畦; 밭을 가는 사람으로 낮은 신분을 말함)의 귀신들도 자손의 추모를 받지 못하는 자가 없다. 제사의 음식은 또한 집안의 빈부에 따라 하되 풍성한 것은 중요하지 않으니, 중요한 것은 정결하게 하고 정성을 지극히 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해야 할 것이니 제사를 지낼 때는 마음으로 공경하기를 지극히 하여 마음이 항상 조상에게 있으면 조상이 양양히 있는 듯 하여 어찌 아니 정성에 감동하지 않고 나의 제사를 흠향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성묘를 할 때도 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듯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축소된 성묘
그러나 요즘 성묘는 말 그대로 묘소를 살피는 정도로 생각하여 음식은 준비하지 않는다. 단지 술과 과일, 말린 고기인 포(脯)를 의미하는 주과포(酒果脯)만 준비하는 정도이다. 또한 성묘를 하는 시기도 한식 정도이고, 요즘은 묘제를 대신하여 추석 때 성묘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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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알
매일 새벽 사당에 고하는 문안인사, 신알
신알(晨謁)이란 그 집안의 종자(宗子)로서 그 사당(祠堂)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인 주인이 매일 새벽 사당에 문안인사를 드리는 예이다. 문안인사를 드릴 때는 심의(深衣)를 입고 분향하고 재배한다. 신알을 하는 장소는 사당 안이 아니라 사당의 뜰에서 하는데, 이를 정배(庭拜)라고 한다. 신알을 할 때는 음식은 차리지 않고 단지 분향(焚香)하고 정배만 한다.
신알은 주인이 하는 예이므로 자식과 조카들이 주인과 함께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인이 없을 때 단독으로 할 수는 없다. 이는 종법(宗法)의 질서를 엄격히 하기 위한 것이다. 상중(喪中)에는 신알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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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고
집을 비우고 외출함을 알리는 예, 출입고
출입고(出入告)란 주인과 주부(主婦)가 집을 비우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입필고(出入必告)라고 하여 반드시 고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외출하는 기간에 따라 고하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첫째, 주인과 주부가 가까운 곳에 나갈 때는 대문에 들어가서 고한다. 고하는 방법은 읍(揖)을 하는 것으로 이를 우러러보면서 예를 다한다는 뜻의 첨례(瞻禮)라고 한다. 돌아와서도 같이 한다.
둘째,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 올 때는 향을 피우는 분향(焚香)을 하고 두 번 절하는 재배(再拜)를 한다.
셋째, 멀리 나가 열흘 이상이 지나 돌아오면 재배하고 분향하고 사유를 고한다. 가기 전에는 어디에 다녀온다는 연유를 말씀드리고 재배한다. 돌아와서는 역시 분향재배하고 돌아왔음을 고한다.
넷째, 한 달 이상을 지내고 돌아온다면 중문을 열고 계단 아래서 서서 재배하고 동쪽계단으로 올라가서 분향하고 고한 후 재배한다. 다시 내려와서 자리에 돌아와서도 재배한다. 이때 남자는 재배하고 여자는 4배(四拜)하는데 이를 협배(俠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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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례
사당에서 선조를 뵙고 인사를 드리는 제사, 참례
참례(參禮)란 설날ㆍ동지ㆍ하지ㆍ초하루ㆍ보름날 사당(祠堂)에 음식을 차리고 올리는 제사이다. 이러한 날 하루 전에 청소를 하고, 다음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신주(神主)를 모신 각 감실(龕室)의 발을 걷는다. 이때 주인이 하는 신알(晨謁)은 평상시처럼 한다.
각 감실 앞의 탁자에 햇과일을 담은 큰 쟁반을 진설(陳設)한다. 각 신위(位)마다 찻잔과 받침, 술잔과 받침을 각각 신주를 넣는 주독(主?) 앞에 놓는다. 향탁 앞에는 그릇에 모래를 담고 띠풀을 꽂은 모사(茅沙)를 놓는다. 별도로 동쪽 계단 위에 탁자를 마련하고 술 주전자, 잔과 받침을 놓고 그 서쪽에 술병을 놓는다. 세숫대야와 수건 각 두 개를 동쪽 계단 아래의 동쪽과 서쪽에 놓는다. 서쪽의 것은 주인이, 동쪽의 것은 집사자들이 손을 씻는 것이다.
제사와 다르게 강신을 먼저 하는 제사, 참례
참례에서는 강신을 먼저 하고, 제사에서는 참신을 먼저 한다. 이는 참례가 원래 선조를 뵙고 인사를 드리는 참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신하기 전에 참신을 해버리면 강신 후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 때에는 강신을 한 뒤에도 음식을 올리고 술을 올리는 여러 절차가 있기 때문에 참신을 먼저 한다.
주인이 앞으로 나아가 주전자로 술을 따른다. 원래는 주부가 차를 젓고 온도를 조절하는 다선(茶?)을 가지고 올라가 차를 넣는 점다(點茶)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차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이 술을 따르면 주부가 나아가서 시저를 바로 놓는 정도로 마친다. 주인과 주부가 동서로 나뉘어 서서 주인은 재배, 주부는 4배한다. 이어 자리로 돌아와 참사자들과 함께 재배하여 마친다. 술을 한 번만 올리고 축문을 읽지 않는 방법을 무축단헌(無祝單獻)이라고 한다.
술을 진설하지도 신주를 내모시지도 않는 보름의 참례
보름의 참례에서는 술을 진설하지 않고 신주를 내모시지 않는다. 그리고 술을 올리지 않고 차만 올린다. 만일 가난하다면 초하루와 보름에 모두 분향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중(喪中)에도 참례는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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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사
명절에 시절의 음식으로 지내는 제사, 절사
절사(節祀)란 청명(淸明)ㆍ한식(寒食)ㆍ중오(重五)ㆍ중양(重陽)ㆍ동지(冬至) 등의 속절(俗節)에 계절 음식을 사당(祠堂)에 올리고 지내는 제사이다. 세속의 명절에 그 철에 나는 음식을 올리고 지낸다. 원래 명절의 제사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작자미상의 예서(禮書)인 『광예람(廣禮覽)』에서는 이 제사를 속절(俗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이미 음식을 갖추어 잔치를 열어 즐기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 있었다. 그래서 세속의 인정에 따라 조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시절의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비록 예(禮)에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인정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술은 한 번만 올리는 정도로 간단하게 지내는 제사, 절사
각 계절에 숭상하는 음식을 큰 쟁반에 올리고 술은 한 번만 올리는 정도로 간단하게 지낸다. 시절에 올리는 음식은 입춘(立春)에는 춘병(春餠)을 올리고, 정월 대보름에는 하얀 찹쌀가루를 반죽해 그 속에 여러 가지 소를 넣어 빚어 송편과 비슷하게 생긴 동그란 떡인 원자(圓子) 등을 올린다. 한식(寒食)에는 조당(稠?), 냉죽(冷粥) 등을 올리고 단오에는 찹쌀로 만든 떡을 갈대 잎으로 싸서 만든 각서(角黍) 혹은 단종(團?)이라는 떡을 올린다. 설[正朝]에는 떡국을 올리고, 동지에는 팥죽을 올린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가 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올리는 것으로 관행으로 하였다. 정월 초하루에는 병갱(餠羹) 혹은 탕병(湯餠)이라고 하여 떡국을 올린다. 정월 보름에는 약반(藥飯)이라고 하는 약밥을 올린다. 삼월 삼짓날에는 진달래 등으로 지진 화전(花煎), 애병(艾餠)이라고도 하는 쑥떡을 올린다. 단오에는 보리밥을 올리는데, 이를 대맥반(大麥飯)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리를 삶아 건져서 오미자 국에다 띄워서 먹는 음료수인 수단(水團)도 올린다. 유월 유두(流頭)가 되면 소맥병(小麥餠)이라고도 하는 밀전병을 올린다. 칠월칠석에는 햅쌀로 만든 떡인 신도병(新稻餠)을 올린다. 9월 9일 중양절 혹은 중구에는 국화전(菊花煎)과 밤으로 만든 떡인 율병(栗餠)을 올린다. 동지가 되면 팥죽인 두죽(豆粥)을 올린다. 이 때 떡국을 제외한 다른 시절 음식에는 꿀 종지를 함께 차린다.
간결하게 지내므로 신주를 내모시지 않고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 절사
제사를 지내는 방식과 형식은 참례와 같다. 그 계절에 숭상하는 것을 큰 쟁반에 담아 사당 안에 진설하고 매월 초하루에 신에게 아뢰는 고삭(告朔)의 예로 올린다. 이렇게 하면 융성함이 있고, 또한 간소하게 하는 절차에도 맞으며, 간곡한 정도 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간결하게 지내기 때문에 신주를 내모시지 않고 사당에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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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사당에서 간소하게 올리는 제사, 차례
차례(茶禮)란 초하루와 보름, 속절(俗節), 명절(名節) 등에 사당(祠堂)에서 간소하게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지역에 따라 다례(茶禮) 혹은 차사(茶祀)라고도 한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비롯한 각종 예서(禮書)에는 ‘차례’라고 이름 붙인 제사는 없다. 그러나 초하루와 보름의 참례, 명절과 속절의 절사(節祀), 입춘(立春) 등에 올리는 천신(薦新) 등의 제사를 통틀어 차례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설날에 올리는 설차사, 정월 보름에 올리는 보름차사, 유월 유두(流頭)에 올리는 유두차사, 동짓날에 올리는 동지차사 등의 용어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본래 술 대신에 차를 올렸던 제사, 차례
차례란 원래 술을 올리지 않고 차를 올리는 제사였다. 일찍이 신라시대에 충담사(忠談師)가 매년 삼월 삼짓날과 9월 9일 중구(重九)에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끓여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절에서 4명절에 차를 올렸다는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차를 올리는 제사였고, 불교적인 제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사신의 대접이나 진연(進宴) 등의 잔치에서도 차를 올렸다는 것으로 보아 차를 올리는 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차를 사용하지 않고 지낸 제사, 차례
실제로 제사(祭祀) 절차에는 헌다(獻茶), 점다(點茶) 등 차를 올리는 절차가 있다. 사시제(四時祭)의 경우 신이 제사음식을 흠향(歆饗)하는 합문(闔門)을 마치는 계문(啓門)을 한 다음에 차를 올리는 절차가 있다. 또한 참례(參禮)나 절사(節祀) 등에는 술을 올리고 나서 차를 올리는 절차가 있다. 그러나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사시제의 진다(進茶)의 절차에서 숭늉인 숙수(熟水)로 차를 대신한다’고 하였고, ‘보름날에는 술을 쓰지 않고 차만 쓴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풍속에는 차를 쓰는 예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례비요(喪禮備要)』와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는 차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차를 쓰지 않기 때문에 진다, 점다 등의 절차를 삭제한다고 하여 차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제사, 차례
그런데, 조선 후기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초하루에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였고, 『해동죽지(海東竹枝)』에도 속절의 절사를 차례라고 하였으며, 설차례를 떡국을 올린다고 하여 떡국차례라고 하였던 것처럼 조선 후기 민간에서 차례 혹은 차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차례라는 용어는 고전적인 예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기제사(忌祭祀)와 묘제(墓祭)가 중요시되어 제사의 으뜸이었던 사시제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이에 따라 사시제를 대신하고, 명절과 속절의 절사, 초하루와 보름의 참례 등의 제사가 4명절에 차례를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안에 따라 아직까지도 속절에 차사를 지내는 종가(宗家)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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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새로운 음식이 나왔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천신
천신(薦新)이란 새로운 음식이 나오면 올리는 제사의 일종이다. 제사이기보다는 새로운 음식이 나왔기 때문에 조상에게 먼저 드리고 먹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제물은 올리지만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봄에는 앵두를 올리고, 과일이 익을 때마다 올린다. 그리고 초여름에는 보리를, 초가을에는 기장을, 늦가을에는 벼를 올린다. 그래서 새 보리가 나면 떡국이라고도 하는 탕병(湯餠)을 올리고 쌀이 나오면 밥을 지어 올린다고 한다.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의하면 “새로운 물건이 있으면 삭망에 함께 진설한다. 밥을 지을 수 있는 오곡(五穀)이면 몇 가지 찬을 갖추어 올린다. 비록 보름이라도 신주(神主)를 내모시고 뇌주(?酒)한다. 생선과 과일 따위는 신알(晨謁)할 때 독을 열고 분향재배(焚香再拜)하고 잔을 한 번 올린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유추해 볼 때 천신은 별도의 제사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신알, 참례(參禮), 절사(節祀) 등의 간편한 제사 때 함께 올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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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즉고
집안의 길흉사를 고하는 제사, 유사즉고
유사즉고(有事則告)란 집안에서 생긴 길흉사의 모든 일을 사당(祠堂)에 계신 조상들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일을 알리는 정도이지만 형식이 제사이므로 제사로 분류한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참례(參禮)와 같다. 술과 차를 올리고 재배한다. 주부(主婦)가 먼저 내려오고, 주인이 향로(香爐)와 향을 담는 향합(香盒)을 올려놓는 향탁(香卓) 남쪽에 꿇어앉으면 모두 꿇어앉는다. 축관(祝官)이 고할 내용을 모두 읽으면 주인이 재배하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당에 고하는 일에는 관직(官職)을 받았을 때, 관직을 승진하거나 강등되었을 때, 추증하여 신주를 고쳐 쓰고 교지를 태우는 의식을 행할 때, 적장자(嫡長子)를 낳았을 때, 집안의 대를 이을 사자(嗣子)를 세웠을 때, 관례(冠禮)나 혼례(婚禮)를 고할 때,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초상(初喪)이 났을 때 등의 경우가 포함된다. 아뢸 말이 적을 때는 굳이 축문은 쓰지 않아도 된다.